[아이뉴스24 정승필 기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러시아산 경유 제재를 한시적으로 완화했다. 급등한 연료 가격을 낮춰 민심을 돌리려는 조치지만, 공급량이 적어 효과는 제한적일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에 전쟁 자금을 제공할 수 있다는 비판도 커지고 있다.

트럼프, 치솟는 경유값에 민심 악화⋯러시아 제재 완화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9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통화한 뒤 경유 공급 합의를 발표했다. 러시아가 경유 30만t 이상을 즉시 공급하고 11월 50만t, 이후 100만t을 추가로 내놓는 내용이다. 정유시설 가동 상황에 따라 최대 300만t을 더 공급하는 방안도 제시됐다.
미국 재무부는 같은 날 러시아산 경유 판매와 운송, 수입 등을 허용하는 특별 면허를 발급했다. 기한은 내년 4월 7일까지다. 러시아도 경유 수출 금지 조치를 일부 해제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러시아와 손잡은 배경에는 중간선거를 앞두고 커진 물가 부담이 있다. 이란 전쟁으로 경유 가격이 급등하면서 화물 운송비와 농업 생산비가 오르고 있다. 경유는 트럭과 농기계 등에 주로 쓰여 가격이 오르면 물류비와 식료품 가격에도 영향을 준다.
미국 노동부가 14일(현지시간) 발표한 9월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전년 동월 대비 3.7% 올라 8월(3.4%)보다 상승 폭이 커졌다. 특히 휘발유 가격이 전월보다 9.1% 뛰면서 전체 물가 상승을 주도했다.
경유 가격 상승 폭은 더 크다. 미국자동차협회(AAA)에 따르면 지난 9일 평균 경유 가격은 갤런당 6.28달러로 이란 전쟁 이전보다 약 70% 올랐다.
연료 가격 상승은 소비자 부담을 넘어 공화당에도 정치적 압박으로 작용하고 있다. 물가가 오는 11월 3일 중간선거에서 주요 쟁점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로이터통신이 지난달 30일부터 이달 5일까지 미국 성인 4506명을 조사한 결과, 78%가 물가 상승에 트럼프 행정부 책임이 일부 있다고 답했다. 공화당 지지층에서도 64%가 같은 반응을 보였다.
러시아 자금줄 열어준 트럼프⋯미 의회·유럽 반발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선거 전 연료 가격을 낮춰야 할 필요성이 커진 셈이다. 그러나 러시아산 경유 공급을 허용하면서 또 다른 정치·외교적 부담을 떠안게 됐다.
미국은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뒤 러시아산 원유와 석유제품 수입을 금지했다. 에너지 수출 수익을 차단해 러시아 전쟁 수행 능력을 약화시키려는 목적이었다.

하지만 이번 합의는 러시아가 경유 판매 수익을 확보할 길을 열었다. 초기 공급 물량인 30만t만으로도 약 4억달러의 매출을 올릴 수 있는 것으로 추산됐다. 미국이 자국 물가를 낮추려다 러시아에 새로운 수익원을 제공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트럼프 행정부는 러시아를 우크라이나 종전 협상으로 복귀시키기 위한 조치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공화당 의원 6명을 포함한 상원의원 12명은 러시아 전쟁 자금 지원을 우려하며 합의 철회를 촉구했다.
유럽에서도 반발이 나왔다.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는 이번 합의를 "매우 위험한 선택"이라고 비판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도 러시아에 전쟁 자금을 제공하는 결정이라며 반대했다.
러시아산 경유, 가격 안정 효과 제한적
문제는 이런 정치·외교적 부담에도 정작 경유 가격 안정 효과가 크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우선 공급량이 적다. 러시아가 즉시 공급할 30만t은 약 225만배럴로, 미국 운송 부문 하루 경유 소비량인 294만배럴에도 못 미친다.
실제 시장에 공급되기까지 시간도 걸린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드론 공격으로 정유시설이 피해를 입어 생산에 차질을 빚고 있다. 영국 투자은행 팬뮤어 리버럼(Panmure Liberum)은 선박 확보와 운송에 약 3주가 걸려 중간선거 전 가격 인하 효과는 크지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러시아산 경유가 공급되더라도 국제시장 전체 물량이 얼마나 늘어날지는 불확실하다. 기존 수출 물량을 다른 시장으로 돌리는 데 그친다면 공급 증가 효과가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미국 역시 경유 수입보다 수출이 많은 국가여서 러시아산 물량이 곧바로 미국 내 가격 하락으로 이어지는 구조는 아니다.
여기에 이란 전쟁까지 겹쳐 국제시장 공급 부족이 이어지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지난 9월 러시아와 중동 지역 경유 공급 차질은 하루 약 130만배럴로 전 세계 수요의 4.5%에 달했다. IEA는 공급 부족이 내년까지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결국 러시아산 경유 제재 완화만으로는 공급 부족을 해소하기 어렵다는 분석이다. 실제 생산량을 늘리고 전쟁으로 훼손된 정유시설을 복구해야 가격 안정 효과도 커질 수 있다.
황성현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기존 러시아산 경유 수출 물량이 미국으로 들어간다면 글로벌 공급 증가 효과는 제한적"이라며 "전쟁으로 훼손된 정제 설비능력이 복구되지 않는 한 디젤 중심의 높은 정제마진은 지속될 전망"이라고 내다봤다.
/정승필 기자(pilihp@inews24.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