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B] 선풍기 칩부터 직접 만든다는 인도…한국 반도체가 10년 전 中 떠올린 이유

[사이드B] 선풍기 칩부터 직접 만든다는 인도…한국 반도체가 10년 전 中 떠올린 이유

中처럼 범용칩부터 자체 개발
가전·車 등 바로 적용할 산업 갖춰
'세미콘 2.0'에 18조...AI칩도 공략
韓 생산·설계 IP 협력 가능성

[아이뉴스24 권서아 기자] "10여 년 전 중국을 보는 것 같습니다."

최근 인도에서 선풍기와 에어컨, 전기차 등에 들어가는 범용 반도체를 직접 설계해 내놓는 업체들이 늘면서 국내 팹리스(반도체 설계전문) 업계에서 나오는 얘기입니다.

23일 팹리스업계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중국의 초반 움직임과 같다"며 "인도도 일단 레거시(범용) 분야가 커질 것으로 본다. 예전에 사다 쓰던 칩을 직접 개발해 제품으로 내놓는 방식이 중국과 비슷하다"고 말했습니다.

국내 팹리스 업계가 중국과 인도 반도체 시장을 바라보는 모습. [사진=챗GPT로 생성한 이미지]

사실 인도에 반도체 설계 인력이 부족했던 것은 아닙니다.

인도는 원래 반도체 설계 인력이 많은 나라입니다. 퀄컴과 AMD, 인텔 등 미국 반도체 기업들도 오래전부터 현지에 연구개발(R&D) 조직을 두고 있습니다. 인도 정부에 따르면 전 세계 반도체 설계 인력의 약 20%가 현지에서 일합니다.

그런데 그동안 인도 엔지니어가 설계한 칩 상당수는 해외 기업의 제품으로 팔렸습니다. 2014년 중국과 인도의 집적회로(IC) 설계산업을 비교한 연구에서도 이런 차이가 나타납니다. 인도가 글로벌 기업에 설계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성장했다면 중국에서는 자국 팹리스들이 직접 제품을 만들어 파는 시장이 커졌습니다.

최근 인도에서 나타나는 변화는 후자에 가깝습니다.

대표적인 게 선풍기입니다.

인도 업체들이 개발하고 있는 반도체 가운데 하나가 브러시리스 직류(BLDC) 모터 제어용 칩입니다. BLDC 모터는 반도체로 회전 속도를 조절해 소음이 적고 전력 효율이 높습니다.

선풍기와 에어컨, 냉장고부터 전기차와 드론, 로봇까지 쓰입니다. 여기에는 모터를 제어하는 마이크로컨트롤러(MCU)와 모터드라이버, 전력관리반도체 등이 필요합니다.

앞선 관계자는 "인도는 시장도 크고 칩을 바로 적용할 산업도 이미 있다"며 "사다 쓰던 것을 자체 개발해 칩까지 내놓기 시작하면 이런 레거시 제품부터 시장이 커질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습니다.

인도 팹리스 Vervesemi가 개발 중인 선풍기·환풍기용 BLDC 모터 컨트롤러 관련 장치. [사진=인도 정부 PIB 홈페이지 캡처]

실제로 인도 팹리스 Vervesemi는 정부의 설계연계 인센티브(DLI)를 받아 BLDC 선풍기와 전기차, 드론용 모터제어 칩을 설계해 테이프아웃(설계 완료)까지 마쳤습니다. IndieSemiC도 중국산 저가 칩과 경쟁할 자체 MCU를 개발하고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국내 업계가 중국을 떠올립니다.

중국 반도체산업협회 IC설계분회에 따르면 중국 IC 설계기업은 2014년 681곳에서 2016년 1362곳으로 불과 2년 만에 두 배로 늘었습니다. 지난해에는 3901곳까지 증가했습니다.

하이실리콘이나 유니SOC 같은 대형 업체뿐 아니라 기가디바이스, SG마이크로 등 MCU와 아날로그·전력관리반도체를 만드는 업체들도 성장했습니다.

처음부터 최첨단 AI 칩만 노린 것이 아니라 시장이 크고 자국에서 많이 사용하는 범용 반도체부터 자체 제품을 늘려온 겁니다.

인도 정부도 여기에 돈을 붓고 있습니다.

아슈위니 바이슈나우 인도 전자정보기술부 장관이 지난 8월 31일 '세미콘 2.0' 관련 기자회견에서 인도 반도체 정책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인도 정부 PIB 홈페이지 캡처]

2021년 12월 7600억루피(약 11조원) 규모의 '세미콘 1.0'을 시작했고 지난 7월에는 1조2750억루피(약 18조원) 규모의 '세미콘 2.0'을 승인했습니다.

세미콘 2.0은 칩 설계뿐 아니라 장비·소재와 신규 팹(공장), 첨단 패키징, 연구개발, 인력까지 지원합니다. 인도 정부는 DLI 다음 단계에서 팹리스 최소 50곳을 육성한다는 목표도 세웠습니다.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인도 역시 범용 반도체를 키우는 동시에 AI 등 첨단 반도체에도 투자하는 '투트랙' 전략을 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도 반도체가 커지는 게 한국에는 좋은 일일까요, 나쁜 일일까요.

당장은 두 가지 가능성이 모두 있습니다.

한국 팹리스의 세계 시장 점유율은 업계 추산 1~2% 수준입니다. LX세미콘은 디스플레이구동칩(DDI), 텔레칩스는 차량용 반도체, 어보브반도체는 MCU 등 특정 제품에서 경쟁력을 키워왔습니다.

인도 업체들이 MCU와 전력관리반도체 같은 범용 제품을 본격적으로 내놓기 시작하면 일부 영역에서는 국내 업체와 경쟁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새로운 고객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업계 관계자는 "(인도 팹리스와도) 협업이 가능하다. 우리나라는 제조가 있기 때문"이라며 "인도에서 설계한 칩을 한국의 레거시 공정에서 생산할 수 있고 설계 IP(지적재산권)에서도 같이 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인도에는 설계 인력이 많지만 웨이퍼 생산과 패키징·테스트 기반은 이제 확대되는 단계입니다.

인도에서 칩을 설계하고 한국 파운드리에서 생산하거나, 개발 비용이 많이 드는 설계 IP를 인도에서 들여와 한국 기업의 설계를 보강하는 식의 협력이 가능하다는 얘기입니다.

지난 17~19일 인도 뉴델리 야쇼부미에서 열린 반도체 전시회 '세미콘 인디아 2026' 한국관에서 국내 반도체 기업들이 현지 업체와 상담하고 있다. 한국관에는 국내 반도체 기업 15곳이 참가했다. [사진=KOTRA]

실제로 지난 18일 인도 최대 반도체 전시회 '세미콘 인디아 2026' 한·인도 라운드테이블에는 양국 관계자 115명이 참석했습니다.

구체적인 논의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인도 정부는 제조와 기술, 소재, 첨단 패키징, 투자와 공급망 협력 등을 논의했다고 밝혔습니다.

또 다른 팹리스업계 관계자는 "인도는 팹리스가 많이 성장하고 있고 반도체 지원 정책도 확대되고 있다"며 "(일부) 국내 업체들도 그 시장을 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10여 년 전 중국 반도체 산업이 커질 때도 처음부터 지금 같은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해외에서 사다 쓰던 칩을 하나둘 직접 만들기 시작했고, 수많은 팹리스가 생겨났습니다. 거대한 내수시장은 이들이 제품을 시험하고 키울 무대가 됐습니다.

지금 인도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아직 중국 반도체 산업과 같은 길을 갈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이릅니다. 제조 기반과 공급망 등 넘어야 할 차이도 큽니다. 다만 선풍기 하나에 들어가는 작은 모터칩을 직접 만드는 변화는 가볍게 볼 일만은 아닙니다.

남이 만든 칩을 사서 쓰던 나라에서, 자기 이름을 붙인 칩을 만들어 파는 나라로 바뀌는 시작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 반도체 업계가 인도를 바라보는 시선도 그래서 조금씩 달라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고객일 수 있고 협력 상대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경쟁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권서아 기자(seoahkwon@inews24.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