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최기철 기자] 이흥구 대법관이 7일 퇴임하면서 12·3 비상계엄 이후 사법부가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국민에게 제때 입장을 밝히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정치적 사건이 법원으로 몰릴수록 진영 논리가 아닌 “법원의 언어와 문법”으로 일관되게 말해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이 대법관은 이날 퇴임사에서 “12·3 비상계엄 후 벌어진 일련의 상황을 보면서 대법원이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국민들께 법원의 입장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거나 실패했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국민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가장 필요한 시점에 가장 적절하게 소통하면서 사법부가 어떤 판단과 의지를 가지고 있는지 잘 설명하고 전달해야 한다”며 “법원이 말해야 할 때 제대로 말하지 못하면 점점 말할 기회조차 잃게 된다는 냉정한 진실을 깨닫게 된다”고 했다.
비상계엄 이후 윤석열 전 대통령과 정치권 인사들을 둘러싼 주요 사건이 잇따라 법원으로 넘어온 상황에서 사법부가 보다 적극적으로 국민과 소통했어야 한다는 취지로 풀이된다.
이 대법관은 특히 정치적 사건을 다루는 법원이 정치권의 진영 논리에 휩쓸려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정치적 사건이 법원으로 몰려들수록 정치의 문법에서 벗어나 법원의 언어와 문법으로 일관되게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정치의 문법에 대해 “진보와 보수 등 진영의 구분과 대결, 진영의 이해관계에 따른 사실의 재해석과 단순화 등을 특징으로 한다”고 규정했다.
반면 독립된 법원의 언어와 문법은 “공정한 룰, 공존과 상호 존중, 사실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과 탐구, 일관된 법리와 충실한 논증, 숙고와 숙의”를 특징으로 한다고 했다.
이 대법관은 “정치적 사건이 쏟아지면서 그 여파로 법원이 흔들릴수록 법원의 문법과 지향점은 무엇인지, 우리가 이에 충실했는지, 이를 제대로 전달했는지 끊임없이 성찰하고 묻고 답해야 한다”며 “이것이 충분하지 못하면 법원이 정치적 소용돌이에서 헤어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사법부에 대한 국민 불신에 대해서도 자성을 주문했다. 그는 “법원의 힘과 권위는 주권자인 국민의 신뢰로부터 나온다”며 “이 상황을 못마땅하게 여기기보다는 그 원인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해소해 나가려는 미래지향적인 자세와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최근 추진된 이른바 ‘사법 3법’에 대해서는 입법 과정에 아쉬움을 나타내면서도 그 배경에 법원에 대한 오랜 불신이 있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고 했다.
이 대법관은 “사법 3법은 오랫동안 유지되던 재판제도나 대법원의 위상과 구조를 크게 바꾸게 될 것”이라며 “법원의 의사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입법 과정이 충격적이고 안타깝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입법의 배경에는 재판에 대한 국민들의 오래된 불만, 불신이 깔려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며 불공정하거나 충실하지 못한 재판, 당사자의 삶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재판, 설명이 부족한 재판 등을 불신의 원인으로 꼽았다.
그는 재판소원과 법왜곡죄가 법관의 업무 수행에 상당한 제한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평가하면서도 “법관이 흔들림 없이 자신의 재판을 함으로써 헤쳐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대법관 증원에 대해서는 “대법원의 구조와 기능, 전체 법원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라며 대비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 대법관은 6년간 대법관으로 근무하면서 대법원이 과도한 사건 부담에 짓눌려 최고법원으로서 정책적 기능을 충분히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고도 지적했다.
그는 “대법관과 구성원들이 몰려드는 사건의 홍수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시스템”을 가장 큰 문제로 꼽으며, 대법원이 사실심을 보완하는 기능에서 과감히 벗어나고 고등법원이 그 역할을 최종적으로 담당하도록 항소심 구조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퇴임사의 마지막에는 법원이 민주주의와 인권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라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이 대법관은 “법원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인권과 시민의 권리를 지키는 안전판이자 최후의 버팀목”이라며 “피해자인 국민들이 마지막으로 의지할 곳”이라고 말했다.
이어 “다양한 사회적 갈등이 표출되고 정치적 분열과 대립이 격해질수록 법원이 나아갈 방향을 잃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든든히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그것이 헌법이 법원에 요구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역할”이라고 했다.
이 대법관은 2020년 9월 대법관에 취임해 6년 임기를 마쳤다. 그는 퇴임사를 통해 “매일 재판하고 있지만 동시에 매일 재판받는 것이 대법관의 직업적 숙명”이라며 임기 동안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권리, 노동자의 권리, 국가권력에 대한 사법적 통제 등을 중시했다고 회고했다.
/최기철 기자(lawch@inews24.com)